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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리뷰_'우리를 속이는 말들' by 박홍순

뱃살날다 2021. 1. 26.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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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책을 거의 읽지 않거나 실용 도서 위주로만 독서를 해온것 같다. 순수(?)인문학 도서는 꽤 오랫만인듯.

카드뉴스에 낚여 책을 구입한 후 바로 읽지 못하다가, 간만에 책장정리를 할 겸 집어들고 슥- 훑어보다가 그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조종한다'는 저자의 말에서부터 퀘퀘한 속담이 늘어선 목차까지 그리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이 책의 어떤 점이 내 흥미를 끌었을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뻔한 속담이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있겠거니 짐작이 가고,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속담이 위계적인 이데올로기를 품고있음이야 쉽게 수긍이 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이미 수년에 걸쳐 다방면으로 까였으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내 흥미를 끈 '이건 의외인데...?' 싶었던 목차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와 '인간은 다 이기적이다', '(미술을) 아는 만큼 보인다'. 이건 나조차도 '음? 사람이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건 맞는거 아님?' '그럼 사람의 본질이 이기적이지 아니란 말인가' '미술은 아는만큼 보이는게 맞지 않나..? 유명한 미술책 제목도 그렇더만' 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지점이라 저자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목차의 다른 부분들은 후술하고, 일단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나를 속였던 말들'부터 이야기해볼까 한다.

 

 

나를 속였던 말들 -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보통 우리는 '상황에 따라 말이나 마음이 바뀌는 사람, 생각없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 건성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람, 본심과 말이 다른 사람, 충동적인 사람' 들을 가리켜 '진정성이 없는 사람'이라 느낀다. 반면 '자신과 타인에게 진실하고 일관성 있어 믿음이 가는 사람'을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과연 진정성이라는 말에 정체는 있나? 진정성은 확인이 가능한 대상인가.' 사람은 가장 은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도 본심을 있는 그대로 쓰기보다 자기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해서 쓰곤하는데. 사람은 위장에 능하고, 또한 자기가 보고싶은대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 걸 감안하면 '저 사람은 진정성 있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그 사람의 가면에 속아 착각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또한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저자는 프랑스화가 툴르즈 로트렉의 예를 들어 진정성의 허구를 설명한다. 로트렉은 매일 매춘여성들과 교류하며 술을 입에 달고 살며 불규칙하고 방만한 생활을 했다. 그 모습만 보면 '인간쓰레기' 판정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트렉은 평생 편히 먹고살 수 있는 금수저 출신이었음에도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위해 좋은 신분과 풍요로운 생활을 버리고 살고있었다. 또 매춘여성들이 보기엔 낮에는 교양있고 고상한척 살지만 밤에는 돈으로 욕구를 푸는 사람들이야말로 위선자로 보였을 것이며, 그녀들 입장에선 오히려 자신들을 '사람'으로 격의없이 대해주는 로트렉이야말로 진정한 친구였을거다. 남이 보기엔 인생의 시궁창에서 막장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자기자신과 그의 친구들에게 그는 삶을 진정으로 대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람은 욕망을 동력으로 살아가는 욕망기계이고, 그로인해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진정성을 연속성과 동일성의 관점에서 보는 습관을 버려야한다. 나조차도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판이하게 다르지 않은가. 몽상가처럼 진정성에만 집착하다 허구적 개념으로 상대를 규정하고, 타인에게 규정받으며, 오히려 현실적인 해결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저자는 경고한다.

 

>>> 뚜렷하지 않은 진정성에서 대안을 찾다가 사회구조적인 문제해결을 놓칠 수도 있다는 마지막 말에는 깊이 동의한다. 또 진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속았을 수도 있고, 한 때 진심이었다해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며, 내게는 진정성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정성 있을 수 있다는 말에도 깊이 동의한다. 인문학은 종종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해놓고는 결국 추상적인 개념에서 해결책을 찾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문학 도서에서 그 부분을 지적해서 사실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허구이고 변덕스러우며 상대적인 속성이라는 걸 알아도, 난 결국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내 삶에 있어서 계속 진정성을 고민하며 살아갈 것 같다. 나란 인간이란 결국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기에, 내 축적된 경험과 가치관에 근거해 만들어진 나름대로의 '진정성 센서'에 의지해 내게 진심인 사람들을 판별하고 내 사람들에게 진심이려 애쓰며 삶을 헤쳐갈 것이다. 다만 앞으로는 진정성의 허무맹랑하고 변덕스러우며 상대적인 속성까지도 포용하며 살아야겠지.

 

나를 속였던 말들 - '인간은 다 이기적이다'

'인간은 다 이기적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와 관련해 흔히 접하는 말이며 오랜 기간 인간의 본성으로 설명되어 왔던 말이다.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인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고, 경쟁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이기적인 행동 사례만 해도 끝이 없을 거고,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인간의 이기심을 더욱 극대화 시킨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후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생물은 스스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프로그램 된 기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식을 사랑하는 감정조차 유전자에의해 번식에 유리하도록 유도된 감정일 뿐이며,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정하고 보편적 사랑을 나누며 종 전체의 번영을 바라는 일은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전자의 이기성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이기성과 이타성을 상호 대릭적인 이분법적 태도로 왜곡된 사고방식을 만든다.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는 사회는 이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며, 자연스럽게 확대되고 발전된 결과물로 서로 도울수록 사회는 번영했다며 위의 주장을 반박한다. 유전자는 이기적인 동기를 실현하기위해 현실에서 개체의 이타주의를 퍼트린다는 것이다. 이기성과 이타성의 경계가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일 수 있으며, 협동과 유대가 진화의 동력이 된다. 인간 사회, 생물 사회 그 어디에서나 개체간의 협력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으며 생명체를 이루는 세포조차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생존하도록 구성되어있다. 특히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기에 유전자의 이기성이 기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진화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은 이기성이 아니라 이타성이다.

 

>>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타성을 확산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실이다' 는 말이 핵심이었다. 유전자의 이기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생물도, 심지어 세포조차 이기적으로 혼자만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기에 협력하고 서로를 돌보는 집단만이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왔던 것이라고. 이기성은 필연적으로 이타성을 필요로 한다고. 자손을 낳기만하고 돌보지 않는 생물보다 낳고 돌봐줄 수록, 정성을 다해 기를 수록 더 고등한 생물로 진화해 온 역사만 봐도 그렇거니와, 고도로 복잡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자본주의 환경처럼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이 더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유전자가 이기적인 변덕을 부릴 수 있음도 유의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기성과 이타성은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인 건 분명한 것 같다.

 

 

나를 속였던 말들 - '아는 만큼 보인다'

사실 그 어떤 말보다도 날 가장 속박하고 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유럽여행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갔을 때 그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면서 애매한 표정을 지을 때 '내가 미술에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런가..?' 자책했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그냥 그림만 봐서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 성화에서 이 성자는 누구고 이 성자를 상징하는 건 이 물건이고 여기엔 무슨 무슨 성서에 얽힌 사연이 있고... 이 화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 그림을 그릴 때 이러저러한 상황들이 반영되었고....' 하는 도슨트의 해설을 듣고서야 그제야 아 저게 그런걸 상징하는 거였군!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이다. 미술작품 뿐 아니라 고궁이나 관광을 할 때도 그냥 혼자 볼 때보다 설명과 함께 볼 때 훨씬 인상깊게 남고 알찬 경험을 했다 느꼈기에 '알아야 보인다'는 내게 특히나 확고한 고정관념이었다. ex_특히 포로로마노에 갔을 때 공부 좀 하고 올걸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런데.... 몰라도 보인다고? 

 

그러나 과거 미술작품이 종교나 기득권의 영광을 과시하려는 메세지 등을 품고있는 경우가 많았던 데에 비해 현대미술은 순수하게 '회화적인 목적을 위한' 순수예술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로 칸딘스키의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역사적 배경과 지식이 없어도, 관심을 두고 오랜시간 들여다보고 있으면 특정한 느낌이 생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만 몰두하면 순수한 감상과 감각은 부차적인 지위로 격하한다. 보고 느끼는 감정보다 머리로 아는 이성이 우선순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이 심해지면 예술 작품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비평이 더 우월하다는 편견이 팽배하고 예술을 볼 때 작품 자체보다는 그를 둘러싼 배경지식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각 개인이 주도적으로 작품을 느끼고 공감하는 주체가 아니라 전문가들에의해 설명된 지식을 소비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예술 작품과 만나 느끼는 감동이 약해지고 암기된 지식에 기초한 차가운 분석과 평가가 그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보고 느끼는 것과 아는 것이 동등한 지위에서 상호작용 할 때 예술은 감동으로 다가오며 우리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 주체로 발돋움 할 수 있다. 

 

>>> 생각해보면 적어도 예술작품 감상에 있어서는 '내 감상'이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술분야에 가이드라인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거니까. 한 작품을 보고 수백개의 다른 감상이 나올 수 있으며, 심지어 창조자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게 예술의 세계아닌가. 내 경험이나 상황에따라 일반적인 비평이나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점에서 큰 감동을 받기도하고 보는 관점, 느끼는 바가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한다. 배경지식과 비평이 작품을 이해할 때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주는 건 분명하지만, '주입식' 교육은 자칫 예술작품 자체에 흥미를 떨어틀리 수도 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주입식 지식으로 미술을 접하고 흥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다 중요한 건 일단 많이, 정성들여 보는 것 같다. 잘 몰라도 생활 속에 숨쉬듯 예술이 함께 할 때 나름의 안목도 생기고 내 취향이라는 것도 생기는 것 같다. 유럽여행 할 때 부러웠던 점 중 하나가 그거였다. 무심히 길을 걷다가도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생활 속의 예술작품들, 무료로 개방된 미술관. 진짜 '보는 눈'이란 그런 환경에서 키워지는게 아닐지.

 

 

 

기타 '우리를 속이는 말들'

-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대표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속담. 사실은 열을 봐도 하나를 모른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알기에 사람은 자유자재로 가면을 쓰는 존재이며 한 개인도 몹시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심지어 벽덕스러움. 

 

-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경험적, 심리학적 근거로 뒷받침되는 말이지만 그 반대 사례도 얼마든지 있으므로 일반화 시키기 어렵다. 현대에 들어서는 사회상황과 사회구조가 급변하는 특징을 가지면서 점점 더 변화주기가 빨라지고 있음. 이건 십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만 단순비교해봐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음.

 

- 공부는 때가 있다? 그 공부할 때를 위해 정말 우정과 첫사랑, 취미는 나중에 해도 괜찮은가? 공부가 때가 있다는 말은 정확히는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는 때가 정해져있다'는 말 같다. 미래 직업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학을 위해 청소년기를 쏟아붓고 있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니까. 그 현실이 워낙 지엄하기에 '대학진학'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나중에 가서 해도되는 쩌리들로 취급받았지만, 대학을 위해 희생된 청소년기에 나누는 우정, 처음 느끼는 설레임의 감정,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긴 취미 그 모든 게 인생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들이다. 우리나라에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내가 뭘 하고싶은지, 하라는대로 다 했는데 왜 난 지금 이렇게 방황하는지 몰라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대학을 위해 인생의 중요한 고민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여전히 지엄하다. 하지만 그 현실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분명 알아야 한다.

 

-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더 말할 것도 없는 한국의 보수적 권위적 이데올로기 주입 속담. 

 

- 아프니까 청춘이다? 원래 아플 수 밖에 없는 시기라는 위안은 자칫 숙명론에 빠져 저항하고 바꾸려는 시도 대신 체념만 심어줄 수 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종교가 했던 역할처럼. 진짜 필요한 건 실질적인 희망이다.

 

- 소확행을 즐겨라? 개인 취향의 작은 행복을 찾는 일은 중요하지만,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소확행은 이전의 소확행과 성격이 다르다. 대체로 소비를 통해 얻는 기쁨이 기업과 마케팅에 의해 강조되고 조장되는 경향이 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표현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 손님은 왕이다? 소비중독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사회차별과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며 갑질을 조장. 감정노동의 근원. 손님은 그저 손님일뿐.

 

- 여성은 모성애가 있다? 여성의 본질이 모성애에 있기에 출산과 육아에 희생해야 한다는 압박은 부당하다. 모성애는 만들어진 신화다. 근대에들어 특정한 이해관계에따라 인위적으로 생겨난 사고방식. 좋은엄마 컴플렉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존재의의를 출산과 육아에 두게되면 끝내는 알 수 없는 공허함에 빠지게 된다. 출산과 육아가 필요하다면 여성만 아니라 남성, 나아가 사회 전체가 희생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를 속이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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